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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부인 장계향/생애와 업적

    문화관광부 지정 한국의 문화인물 '깨달은 조선여인'장계향!

    여중군자 장계향 (1598~1680)

    선조 31년 경북 안동 금계리에서 태어나 숙종 6년 83세를 일기로 경북 영양 석보에서 타계하였다. 만년에 셋째 아들 갈암 이현일이 사헌부대사헌에 올라 법전에 따라 정부인으로 추증되었다.

    아버지 장흥효는 조선 중기의 대학자로 벼슬도 마다한 채, 집가까이 광풍정(光風亭)이라는 정자를 지어놓고 평생을 제자들과 학문을 논하며 수백 명의 제자를 길러낸 인물이다. 이러한 장흥효가 서른다섯살 되던 해에 얻은 아이가 장계향이었고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레 학문을 접하게 되었다. 셋째 아들인 갈암 이현일이 어머니의 팔십 평생을 기록해 놓은 책 ‘정부인장씨 실기(實記)’에 의하면 그녀는 당시 성인군자의 입문서인 <소학>은 물론, 유가(儒家의 기본적 경전(經典)인 <사서오경>, 세상 돌아가는 실제를 알기 위한 중국역사서 <십구사략>에서 소강절의 난해한 천문도수 학문 <원회운세지수>까지 제대로 이해하였다고 한다.지금까지 전해지는 초서, 그림, 자수 등의 작품을 보면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선조 31년 경북 안동 금계리에서 태어나 숙종 6년 83세를 일기로 경북 영양 석보에서 타계하였다. 만년에 셋째 아들 갈암 이현일이 사헌부대사헌에 올라 법전에 따라 정부인으로 추증되었다.

    아버지 장흥효는 조선 중기의 대학자로 벼슬도 마다한 채, 집가까이 광풍정(光風亭)이라는 정자를 지어놓고 평생을 제자들과 학문을 논하며 수백 명의 제자를 길러낸 인물이다. 이러한 장흥효가 서른다섯살 되던 해에 얻은 아이가 장계향이었고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레 학문을 접하게 되었다. 셋째 아들인 갈암 이현일이 어머니의 팔십 평생을 기록해 놓은 책 ‘정부인장씨 실기(實記)’에 의하면 그녀는 당시 성인군자의 입문서인 <소학>은 물론, 유가(儒家의 기본적 경전(經典)인 <사서오경>, 세상 돌아가는 실제를 알기 위한 중국역사서 <십구사략>에서 소강절의 난해한 천문도수 학문 <원회운세지수>까지 제대로 이해하였다고 한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초서, 그림, 자수 등의 작품을 보면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광해 8년(1616) 나이 열아홉에 부친으로부터 총애를 받던 제자인 석계 이시명의 아내가 되었고 부부는 서로 손님처럼 (相敬如賓), 더 나아가 서로 동지로서 공경하면서 살았다. 그녀는 때를 맞추는 중용(時中)의 모범을 보이는 군자로서 살았으며 특히 자신의 재주를 드러내기보다 한 가정의 평범한 딸이자 가정주부로서 시가와 본가 두 집안 모두를 당시 사회공동체의 기둥이 되는 가문(宗門)으로 일으켜 세웠고 10명의 자녀를 훌륭히 키워 냈다.

    자녀들에게는 늘 “너희들이 비록 글 잘한다는 소리가 들린다 해도 나는 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착한 행동 하나를 했다는 소리가 들리면 아주 즐거워하여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가르침으로서 과거시험 공부보다 성리학의 학문적 본질(義理)을 하나라도 몸소 실천함을 근본으로 삼았다. 또한 강인함과 온유함을 갖춘 도덕적 품성으로 나이 든 사람이나 과부, 고아처럼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을 아무도 모르게 힘껏 도왔고, 만년에 이를수록 숨겨둔 재주와 덕행이 드러나서 칭송받았다. 17세기 이후 조선인들은 그녀를 맹자(孟子)나 정자(程子)의 어머니와 같은 현명한 분이라고 칭송하였다. 여성의 학문적 자유나 사회적 제약이 많았던 시대를 살다간 양반가의 여인,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며 가치로운 삶을 살다간 그녀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과연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케 하는 스승이자 ‘어른’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몸소실천함으로서 가르쳐 준 크나큰 인물이었다.



    생애

    -1598년 11월 24일

       안동 금계리(춘파)에서 아버지 경당 장흥효와 어머니 안동 권씨 사이에 외동딸로 태어나다.


    -1608년(11세)

       소학, 십구사략 등을 스스로 깨우치다.


    -1610년(13세)

       학발시, 경신음, 성인음, 소소음 등을 짓다.('맹호도'도 이 무렵의 작품으로 추정)


    -1615년(18세)

       어머니가 장질부사로 몸져눕자 집안일을 맡다.


    -1616년(19세)

       영해 인량리의 재령이씨 운악 이함의 셋째 아들 석계 이시명과 혼인하다. 이시명은 광산김씨와 사별하고 1남1녀를 두었다.


    -1622년(25세)

       친정 어머니 안동 권씨 부인 운명하시다. 친정에서 어머니 3년상을 치르다. 아버지를 재혼시켜드리다.


    -1631년(34세)

       석계종택 영양군 석보면 원리동으로 분가하다. 도토리 나무를 심다. 시아버지의 발병으로 다시 인량리로 돌아와 보살피다.


    -1632년(35세)

       시아버지 운악선생 운명하시다.


    -1633년(36세)

       친정아버지 경당선생 운명하시다.


    -1634년(37세)

       이복 큰동생을 시댁으로 데려와 가르치다.


    -1636년(39세)

       병자호란 발발하다.


    -1638년(41세)

       남편 이시명이 무고한 옥사와 재판을 받다. 무혐의로 풀려나다.


    -1640년(43세)

       영해 석보면 원리동으로 완전히 이주하다. 모은 재산을 큰조카에게 물려주고 나오다. 도토리 나무 숲을 가꾸어 한 번에 150여명의 끼니를 삼을 만큼되다.


    -1644년(47세)

       시어머니 진성이씨 운명하시다. 모시고 살다가 운명하시고 인량리에서 3년상 입다.


    -1652년(55세)

       병자국치를 슬퍼하며 영양군 수비로 이사하여 은거를 시작하다. 식구 30여명과 함께 살다. 자식들에게 본격적으로 강의하는남편을 따라 명상과 학문, 노동과 인생의 재발견을 위한 생활을 하다.


    -1664년(67세)

       손자 신급(벽계 이은), 성급(밀암 이재)에게 학문을 권려하는 오언시를 써 주다.


    -1670년(73세)

       '희우시'를 쓰다.


    -1672년(75세)

       한글 최초의 요리서, '음식디미방'을 저술하다. 가뭄이 극심하여 현종이 대책을 전국에 걸쳐 구하다. 자식들을 모두 산 아래 세상으로 내려 보내다. 부부만 안동 도솔원으로 옮겨 초근목피로 생활하며 자족하다.


    -1674년(77세)

       안동부 대명동(풍산읍 수곡리)으로 이사하다. 남편 이시명 운명하시다(84세).


    -1680년(83세)

       7월 7일 영해부 석보에서 넷째 아들 숭일의 집에서 운명하시다. 안동 대명동까지 운구하여 장사지내다.


    -1689년(8월)

       셋째 아들 갈암 이현일이 이조판서 직함을 받음으로써 정부인 교지가 내려지다.





    한글로 기록된 최초의 조리서인 음식디미방을 쓴 저술가

    음식디미방을 통해 식품의 과학적 조리법을 최초로 기록한 진취적인 여성, 다시 말해 여성 과학자이다. 조선시대에는 여성이 책을 저술하여 남긴다는 것 자체가 사회적 통념에 어긋난 일이었으나 후대를 위해 사회적 통념에 과감히 도전한 여성이였다.



    어질고 바른 어머니

    10남매를 출중하게 성장시키고 부군 석계 이시명을 일으켜 세운 현모양처로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를 섬김에는 효도하고 근신하는 절차가 갖추어져 있었으며 선군자를 받들어 섬기면서 근 60년 동안을 서로가 손님을 대접하듯이 공경하였으며 모든 일을 반드시 남편에게 먼저 아뢰어 뜻을 받은 뒤에 실행하였다.



    재주보다 선행을 강조한 교육자

    재주보다 선행을 강조하여 일곱 아들을 7룡으로 불리우게 한 교육자. 자녀들에게는 “너희들이 비록 글 잘한다는 소리가 들린다 해도 나는 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착한 행동 하나를 했다는 소리가 들리면 아주 즐거워하여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가르치며 과거시험 공부보다 성리학의 학문적 본질을 하나라도 몸소 실천함을 근본으로 삼았다.



    수기안인(修己安人)의 길을 모색한 사상가

    1627년 청나라가 10만 대군을 이끌고 정묘호란을 일으켜 조선을 침략하자 이에 분개하면서,옛날 중국 제(齊)나라의 강직한 충신인 노중련(魯仲連)이 진(秦)나라가 황제국이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던 고사를 인용하여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지키자고 호소하였다.



    민초들을 다함없이 구휼한 사회사업가

    정유재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속에서 민초들을 다함없이 구휼한 사회사업가. 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이 있으면 불쌍히 여겨 구휼하고 도와주기를 마치 남이 알지 못 하는 자신의 근심처럼 여기고 몰래 남에게 음식물을 보내주고도 알리지 못하게 하여 마을 사람들이 모두 그의 은덕에 감동하였다.



    당대의 서예대가의 절찬을 받은 서예가

    청풍자 정윤목 공이 장계향이 초서로 쓴 적벽부를 보고 말하기를 “ 이 글에 나타난 기풍과 굳센 필세가 호기롭고 굵직함이 우리나라 사람의 글씨와는 그 류(類)를 달리하니 중국 어느 대가의 글씨가 아닌가”라고 경탄하였다.



    빼어난 시를 남긴 시인

    빼어난 시 9수를 남긴 시인. 번암 채문숙 공이 영남의 고적에 「전가보첩」을 갖추어 넣어서 경연에서 주달(奏達)하여 임금의 칭찬을 받은 일이 있었다. 채공은 ‘학발시’를 보고 “「시경」 삼백편 중에 ‘학발시’와 같은 작품은 없었다”라고 하였다.



    산수화를 남긴 화가

    사나운 호랑이를 섬세하게 표현한 ‘맹호도’와 산수화를 남긴 화가. 호랑이는 입을 벌리고 위를 보고 얼굴은 정면으로 보이게 하여 위용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익살스럽고 해학적인 호랑이 그림과는 성격이 다르고 대개 오른쪽에 배치하나 왼쪽에 배치한 것이 다르며 특히 호랑이의 입을 크게 목젖이 보일 정도로 그린 것은 드문 일이다.